나라는 설화

글. 임세병

만일 글조차 쓰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몇 해째 무엇도 그리지 않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망령이라든가 유령 같은 낱말이 내게 온다. 무엇도 하지 않아 무엇도 아닌 내가 과연 무엇인지 되묻자면 나는 나를 음영이라 하겠다. 누군가 입에 올려야만 잠시 살아나는 괴담이라고도 하겠다. 옛날 옛적 어느 곳의 어떤 이가… 하는 오래된 구전. 으레 그런 이야기 속 등장인물처럼 나는 여러 개의 나로 존재해 왔다. 성이 뭐였더라, 키가 컸었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더라는 식으로 각자가 기억하는 조각에 맞춰 뭉뚱그려지다 보면 새로 조합되어 나타나는 인물, 수도 없이 재탄생하는 어느 것, 그게 나다. 나는 여러 몸으로 살아왔다. 갖은 시선 속에서 나라는 ‘나’는 제각기로 정의되었다. 누군가는 나를 영혼의 구원자라 불렀고, 누군가에게 나는 끔찍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때로 나는 낙오자로 보였고, 시샘을 독차지하는 그럴싸한 사람이었다가 부적응자, 수도자로도 불렸다. 여러 판단과 신분을 통과하던 이 모든 시기를 일종의 층이라 할 수 있을까? 계절로 나눌 수 있을까? 시절이라든지 시기, 상황 같은 낱말이 어지러이 떠오르지만 무엇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대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존재론적 성찰을 하자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지금, 나라는 ‘나’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독백이나 방백도 아니다. 차라리 자백에 가깝고, 일종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 이건 고백이다. 나라는 인물이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조각으로 떠돌던 그 모든 소문 속에서 내가 단 하나이길 바라오던 유일한 사람. 너에게 하는 고백이다. 그러나 나는 네 곁에서조차 여러 명으로 흩어졌고, 끝내 하나의 나를 바라는 너의 기다림 앞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왜 너는 나를 떠나려는지 물을 수 없다. 네 이름과 생년월일로 이뤄진 내 모든 비밀번호 속에서, 언젠가부터 너는 활자에 지나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은 점은 네가 여전히 비밀이라는 사실일 뿐. 눈을 감고도 칠 수 있는 너라는 배열은 한때 좌표였다. 내가 멀리서 도망쳐 온 곳, 또 네가 기꺼이 두 팔 벌려 나를 숨겨준 곳. 갈라진 채 떠돌던 내 이름이 마침내 하나로 발음되는 듯했던 청명한 한때가 있었다. 어쩌면 네 믿음이 저무는 일은, 결국 내가 나라는 인물의 서사가 시작되던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옛날 옛적 어느 곳의 어떤 이가… 하는 오래된 구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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