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과 택배
글. 김종소리
사진. 조재무
— 혹시 지금 정발산이야?친구가 보내온 문자. 친구? 그를 친구라고 불러도 될까? 10여 년 전, 나와 그 사이엔 겹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친구는 우리 둘에게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 더운데 맥주나 한잔할래?술이라면 마다하지 않던 나는 좋다고 답했고, 그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친구는 우리를 서로에게 소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너희 둘, 잘 어울릴 것 같아.” 그 후로 우리 셋은 이따금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 그렇다. 친구의 친구. 이것이 그에 대한 적합한 표현이다. 자, 뭐라고 보낼까? 나는 문장을 썼다 지우길 반복하다 답장을 보냈다.— ㅇㅇ 정발산역 근처.ㅇㅇ. 이거 괜찮나? 모르겠다. 괜찮겠지. 친구라고 하기엔 멀지만 그렇다고 격식을 차릴 만한 사이도 아니니까.“맞구나. 정말 오랜만이다.”답장을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낯설지 않은,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예전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한 10년 됐을까요? 마지막으로 본 게.”나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애써 풀어내며 말했다.“맞아. 우리가 20대였으니까, 못해도 10년은 된 것 같네.”“용케 알아보셨네요. 어떻게 알아보셨어요?”“보자마자 알겠던데? 근데 우리 반말하지 않았던가? 혹시 반말 불편해? 존댓말할까?”나는 그의 반말이 불편하진 않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우리는 친구라고 하기에도, 친구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친구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기껏해야 몇 번 술을 함께 마신 사이일 뿐이다. 만약 내가 먼저 그를 알아봤다면 나는 즉시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하며 가던 길을 갔을 것이다.“아니야.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네. 잘 지내지?”나는 의식적으로 반말을 사용하며 안부를 물었다. “응. 잘 지내.”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곤 내 쪽으로 손등을 내밀더니 부드럽게 돌리며 되물었다. “넌?”나는 잠시 그의 손바닥을 빤히 쳐다보았다. 잘 지낸다고 답해야 했다. 그래야 이 어색한 만남을 한시라도 빨리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나는 쉽게 잘 지낸다고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무척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힘든 적이 없다”는 말을 맨날 입에 달고 사는 대표가 하루종일 리클라이너에 앉아 핸드폰으로 골프 영상만 들여다보고 있는 꼴을 볼 때마다 그를 향해 뭐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고, 은근슬쩍 본인 할 일을 내게 떠넘기는 경리부 직원과 암투를 벌이는 날이면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왜 받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짜증이 났고, 내 차를 끌고 수도권 전역의 거래처들을 돌 때면 기름값 지원 명분으로 나오는 쥐꼬리 만한 금액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나는 나를 둘러싼 이 끔찍한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10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친구의 친구에게, 나는 잘 살지 못하고 있다고, 이러저러해서 모든 것이 엉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해봐야 달라질 것도 없고.“다행히 별일 없어.”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그렇구나. 별일 없다니 다행이다.”“너도 별일 없지?”“응.”그가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일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신도시라는 것과 서울 위에 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사실상 이름 말고는 아는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학교 때 소풍으로 갔던 호수공원을 제외하면 일산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일산에 산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일산에 사는 애가 뭐 하러 서울까지 와서 술을 마시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졌을 뿐이었다.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나는 그를 일산 사람의 표본으로 삼게 되었다. 신경써서 세팅한 머리,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피부, 폴로셔츠에 면바지, 캔버스 운동화 조합의 뻔하지만 단정한 옷차림, 허리를 꼿꼿이 세운 반듯한 자세,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유지할 것 같은 다정한 말투⋯⋯. 이런 사람과 내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도대체 어디가?일산에 있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격자로 반듯하게 정비된 도로, 여럿이 걸어도 좁지 않은 인도, 울창한 나무들⋯⋯. 지금껏 내가 살아온 곳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자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나는 자연스레 그를 떠올렸다. 그래, 그런 단정하고 반듯한 사람이 되겠지. 내가 살아온 곳은 인도 중앙에 가로수가 박혀 있어 사람이 찻길로 걸어야 하는, 되는 대로 어떻게든 만든,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내가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비아냥대길 멈추지 않는 이런 음침한 사람이 된 걸까? 물론 환경만으로 사람의 성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지 않을까? 나도 일산에서 생활하다 보면 조금은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담배 피워?”그가 물었다.“응.”“한 대 피울래?”나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번화가 쪽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고, 그는 전자담배에 담배를 꽂아 넣었다.“전자담배로 바꿨구나?”“응.”그가 연기를 뿜으며 답했다. 우리는 잠시 묵묵히 서서 담배를 피웠다. 이 사람은 할 말도 없으면서 뭐 하러 같이 담배를 피우자고 했을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담배 한 대 같이 피워야지, 라는 흡연자들의 인사치레? 이런 구석에 처박혀 연기를 뿜어대는 게 인사치레는 뭔 놈의 인사치레?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헤아리며 주머니 속 휴대용 재떨이를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떼고 말을 시작했다.“우리, 거의 5년 정도 같이 살았어. 그런데 일주일 전에 갑자기 나가겠다고 하더니, 다음날 나가버렸어. 지금은 연락도 안 돼.”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처했다. 갑자기 왜 나간 거야? 내가 둘 사이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질문을 해? 괜찮아? 5년을 함께 산 사람이 갑자기 나갔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리저리 할 말을 찾아보았지만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연기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최근에 자주 다투긴 했는데,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 주기적으로 그랬거든. 보통 그렇잖아? 누구든 같이 살다 보면 자주 다투게 되는 시기가 있잖아. 또 어떤 시기엔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고. 근데 걔는 나랑은 다른 생각을 했나 봐. 갑자기 걔가 나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차마 이유를 물어보지도 못했어. 걔 태도가 너무 단호했거든. 아마 내가 이유를 물어봤어도 대답하지 않았을 것 같아. 이런 상황이 올 때까지 나는 왜 눈치채지 못한 걸까? 무엇이 문제였을까?”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그의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5년간 함께 산 사람이 갑자기 나가겠다고 말한다. 왜 나가고 싶은 거야? 답하지 않는다. 답답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이유 정도는 이야기해줄 수 있지 않아? 여전히 답하지 않는다. 상대의 입을 통해 듣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나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 5년이나 함께 살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생기는 법일 테니까.“이전부터 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진 않았어?”내 물음에 그는 손등으로 턱을 천천히 쓰다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끝이 오고 있다고 느끼긴 한 것 같아.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분명하게 뭐가 문제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니, 느낀 게 맞을까? 잘 모르겠어. 어쨌든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걔의 행동이 이해가 안 돼. 꼭 그런 식으로 나가야 했던 걸까? 그래도 10년을 사귀었고, 5년을 함께 살았는데,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지 않아? 자기 혼자 정하고, 멋대로 통보하면 어떡해? 게다가 아무런 설명도 없었어. 그날 이후로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헤어진 걸 인정하기 싫은 걸까? 모르겠어. 사실은 아까 역에서 너를 알아보고서 아는 체할까 말까, 고민했어. 그러다 너한테는 이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문자를 보냈어. 아니,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어. 그냥 반가웠던 것 같기도 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말이 많지?”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계속 기분이 안 좋은데도 이렇게 웃음이 나는 순간이 있어. 그럴 때면 웃는 나를 보면서 기분이 나빠져. 오늘 아침에도 그랬어.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평소엔 거들떠보지 않던 우체통에 눈길이 갔어. 근데 슬며시 웃음이 나더라고.” “우체통을 보는데 왜?”“이제 택배를 챙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택배?”“응. 걔 툭하면 책을 주문했어. 다 읽지도 못하면서. 게다가 그 택배 상자를 절대 자기 손으로 뜯는 법이 없었어. 택배가 오면 그냥 상자를 현관에 쌓아 두는 거야. 자기가 시켜놓고. 이미 읽고 있는 책이 있으니까 바로 뜯을 필요가 없지. 나중에 볼 때 뜯어야지, 아마 이런 생각이었을 거야. 그런데 나는 현관에 상자가 쌓여 있는 게 꼴 보기 싫었어. 그래서 매번 내가 상자를 뜯어서 책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어. 걔는 테이블 위의 책에도 손을 대지 않았어. 그렇게 차곡차곡 열 권쯤 책이 쌓이면 그걸 또 내가 책상으로 옮겨놨어. 그럴 때면 늘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그게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거야. 내가 알아서 챙길 건데 네가 뭔데 멋대로 건드리냐,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달까? 그게 싫으면 본인이 먼저 챙기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걸 그렇게 계속 내버려두는 게 맞아?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아무튼 그 이상한 신경전을 이제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더라고. 그리고 아파트를 나서는데 기분이 너무 안 좋은 거야. 모르겠어. 그냥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걔, 그 특유의 마이 페이스는 여전한가 보네.”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풀벌레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의 주택가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집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티셔츠가 자꾸 몸에 달라붙어 불쾌했다. 빨리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자야지. 그런데 잘 수 있을까? 이렇게 더운데? 나는 턱에 맺힌 땀을 닦으며 술을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지독한 열대야에 잠들기 위해선 더 취할 필요가 있었다. 집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생맥주 한 잔만 더 마시자. 저 멀리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이 서서 안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 껴안다니, 안 덥나? 그의 얼굴. 친구의 등을 안고 있는 그의 손. 나는 재빨리 뒤돌아 빠르게 걸었다. 술집에 들어가 생맥주를 주문했다. 티셔츠의 목 부분을 잡고 흔들었다. 차가운 실내 공기가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시원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너희 둘, 잘 어울릴 것 같아.” “나는 너랑 걔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내가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응?”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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