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와 레일

글. 김종소리 사진. 조재무

말 끊어서 미안한데. 잠깐만 들어봐. 옛날에 동기가 소개해 준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 새 학기가 막 시작했을 때였어. 동기가 오더니 진짜 괜찮은 아르바이트가 있는데 혹시 할 생각 있냐고 묻더라고. 자기가 곧 관둘 예정인데 기왕이면 아는 사람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면서. 그때 마침 나는 집에서 통학하기가 싫어서 고시원에서 살까, 고민하던 중이었거든?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하나 하던 참이라, 딱이다 싶어서 바로 하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동기가 무슨 일인지는 듣고 나서 하든가 말든가 하라더라고. 당시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란 게 거기서 거기였잖아? 그 아르바이트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어. 술집 서빙이었어. 시급은 당시 최저시급에 딱 맞춘 금액. 아무리 그때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밤에 하는 일치고 짠 편이었지. 그래서 그게 무슨 진짜 괜찮은 아르바이트냐고 물었어. 사실 고시원에서 살 수 있을 만큼만 벌면 돼서 일이 괜찮든 안 괜찮든 별로 상관없긴 했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아르바이트가 좋아 봐야 얼마나 좋겠어? 안 그래? 돈 벌려고 억지로 하는 거지. 동기는 그 술집이 주택가에 있어서 한가한 편이라 힘들 게 없어서 좋다고 하더니, 이어서 감독님이 참 좋은 사람이라 그게 또 좋은 점이라고 했어. 감독님? 내가 감독님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그 술집의 사장님이래. 다들 감독님이라고 부른다고. 잘은 모르겠지만 대학에서 연출을 전공했다는 것 같고, 영화도 한 편 찍었다는 것 같다면서. 그리고 생각해 보니 왠지 감독님이랑 나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덧붙였어. 감독님이 술을 좋아해서 마감하면 아르바이트생이랑 같이 술 마시는 일도 많다면서 나한테 딱 어울리는 아르바이트일 거라고. 나는 바로 하겠다고 했지. 공짜로 술 주는 아르바이트인데 시급이 문제야? 일해보니 동기 말대로 감독님은 참 좋은 분이었어. 나랑 띠동갑이었나? 열 살 넘게 차이가 나는데도 죽이 꽤 잘 맞았어. 오히려 학교 친구들보다 말이 더 잘 통할 때도 많았던 것 같아.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2년 가까이 일하면서 거의 매일 감독님이랑 술을 마셨어. 보통 감독님은 일하면서 술을 마시다가 마감하고 나면 아르바이트생이나 남아있는 단골이랑 이어서 더 마셨어. 어떤 날엔 영업시간보다 마감 후 술자리가 더 북적일 때도 있었어. 서두가 좀 길었다. 여기부터가 본론이야. 언젠가 하루는, 감독님이 마감 전에 엄청나게 취했어. 오픈부터 단골이 와서 같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단골이 가니까 다른 단골이 오고, 다른 단골이 가니까 또 다른 단골이 오고, 이런 식으로 바통 터치하듯이 계속 단골이 와서 일하는 내내 마셨던 거야. 중간부터는 안주 주문도 못 받았어. 내가 할 수 있는 간단한 것 빼고는. 마감 시간이 되니까 마지막으로 왔던 단골이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한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어. 다 정리하고 나서 내가 이제 가자고 하니까 감독님이 둘이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하시더라고. 그때 감독님은 반수면 상태였어. 눈을 거의 감고 있었거든. 앞이 보이나 싶을 정도였어. 감독님이 술이 꽤 센 편이라 잘 취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취한 건 그때 처음 봤던 것 같아. 좀 고민이 되더라고. 그 상태로 집에 가면 분명히 사모님한테 한 소리 들으실 것 같은데 괜찮을까? 그렇다고 좀 더 앉아 있는다고 술이 깰 것 같아 보이지도 않고. 내가 안 마시겠다고 하면 혼자라도 마실 것 같은 느낌이라 차라리 빨리 먹고 일어나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결국 알겠다고 하고 자리에 앉았어. 이야기하다 보니까 그때 마셨던 술 생각이 나네. 캐네디안 클럽 6년. 이름만 읊어도 지겹네. 마셔본 적 있어?아니.그럼, 다음에 와. 시켜놓을게. 가성비가 좋은 술이야. 감독님이 이 캐네디안에 꽂혀서 한창 그것만 드실 때가 있었어. 다른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의 반년 넘게 지겹도록 그것만 드셨어. 어디서 캐나다 이야기를 들으면 캐네디안 클럽 6년 병이랑 종이 코스터 위에 놓인 온더록스 잔이 떠오르고, 이어서 조니 미첼의 노래가 떠올라. 조니 미첼 노래 중에 코스터 뒷면에 캐나다를 그렸다는 가사가 있거든. 이게 세트라서 하나를 떠올리면 연달아서 다 같이 떠올라. 아무튼 감독님이 반쯤 감긴 눈으로 술잔을 내려다보면서 감독이란 건 저주 같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어. 한 번 감독이 되면 감독이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아무리 다른 일을 해도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다고. 그러면서 자기는 영화는 안 찍고 술이나 팔고 있으니 타락한 감독이라고 하더라고. 보통 ‘저주’니 ‘낙인’이니 ‘타락’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 잘 없잖아. 감독님도 딱히 그런 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그날은 취해서 그런가 그런 감독스러운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로 하시더라고. 그래서 그런가? 그날 감독님이 한 이야기는 세세한 내용까지 기억이 나. 너 어제 뭐 먹었어?갑자기? 뭐 먹었더라⋯⋯ 몰라. 기억 안 나. 그렇지? 그렇다니까. 나도 그래. 어제 뭐 먹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날 감독님 이야기는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이 난다니까. 희한하지? 게다가 내용도 별거 아니었어. 타락한 감독 이야기 이후부터는 신세 한탄이었거든. 어쩌다 보니 결혼을 했고, 어쩌다 보니 아이를 낳았고, 어쩌다 보니 술집 사장을 하고 있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려서 영화를 찍기는커녕 보기도 힘들고,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생각하다 보면 출근할 시간이고, 그래서 맨날 술이나 마시고, 술 마시면 또 영화 생각이 나고, 영화를 못 찍게 만든 결혼은 뭐하러 해서, 아이는 뭐하러 낳아서, 이런 생각이 들고, 그래도 아내와 아이, 둘을 생각하면 너무 사랑스러운데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라는 게 레일에 올라타는 순간 내리기가 무척 어려워서, 움직이는 바닥 위에 서서 계속 끌려가고, 뛰어내리면 아내와 아이는 어떻게 할 건데, 이런 생각이 들면 발이 더 꽁꽁 얼어붙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가끔 혼잣말로 과거의 자신과 대화를 한대. 너 뭐 하고 있어? 영화 안 찍고? 안 찍는 게 아니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어. 그 자리에 사모님이 안 계셨기에 망정이지. 계셨으면 가정 파탄 났을 거야. 안 계셨으니까 하는 말이었겠지만.우울하네.그런가? 나는 별로 안 우울했어. 그냥 좀 뻔하더라고. 꾸던 꿈 포기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보다 뻔한 이야기가 있나? 다들 그렇지 않아? 다행히 한 잔 다 마시니까 감독님이 먼저 가자고 하시더라고. 감독님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고시원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어.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포기할 건 포기하자.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포기할 게 없더라고. 딱히 엄청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벌어서 적당히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되지. 그런데 지금 봐봐. 우습지만 나는 저렇게 되어버렸어. 결국 감독님이 된 거야. 물론 타락한 감독도 아니고, 누가 감독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지만,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술집 사장을 하고 있고, 자본주의 레일에 올라타서 열심히 끌려가는 중이고, 술도 매일매일 꼬박꼬박 잘 챙겨 마시고 있고.우울하네.아니. 안 우울해. 오히려 좋아. 술 마시는 데 술집 사장보다 좋은 직업은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 집 사모님은 나 술 마시는 걸로 뭐라 안 하시거든. 덧붙이자면, 감독님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술집을 하고 계셔. 말이 좀 길어졌는데 요지는 이거야. 근데 이 이야기를 왜 시작했더라?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알겠지. 맥주나 한 잔 더 줘.진짜 왜 시작했지? 네가 말하던 중이었고, 그걸 내가 끊고 이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왜 시작했지? 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