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판과 블루스크린

글. 김종소리 사진. 조재무

“저기 빈 광고판 보여? 저기에 광고를 하면 효과가 있을까?”나는 옆자리를 향해 묻는다.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만약 누가 너한테 공짜로 저 광고판에 광고를 할 수 있게 해주면 뭘 할 거야?”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재차 묻는다. 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나라면 글자나 그림 없이 전체를 형광 핑크색으로 바를래. 가능하다면 틀까지. 어딘가 이상해 보일 것 같지 않아?”눈앞에 빨간 불빛들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차량 행렬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걸까? 영원히 차 안에 갇힌 채 도로 위에 발이 묶이는 건 아닐까? 이대로 몇 시간이 흐른다. 차 문을 열고 나와 서성이는 사람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 오는 사람도 있다. 그대로 하루가 지난다. 몇몇 사람들이 통에 받아온 기름으로 주유를 한다. 차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아 삼겹살을 굽는 사람도 보인다. 몇십 년 전 귀성길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며칠이 지나자, 아침에 회사에 갔다가 저녁에 집에 들러 짐을 꾸린 뒤 다시 차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긴다. 집, 회사만 왔다 갔다 해도 힘든데 차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피곤이 더해진다. 그렇다고 차를 마냥 버려둘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몇 달이 흐르니 꽤 많은 이들이 주말에만 차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들은 카 바캉스족, 이른바 ‘카캉족’이라 불린다. 주말이면 찾아와 차 안에 전구를 매달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튼다. 유튜브 피드가 카캉족 영상으로 도배된다. 또래보다 일찍 카캉족 되는 법, 집보다 좋은 카캉족의 별장, 집 팔고 카캉족으로 살아요……“오버 좀 하지 마.”나는 옆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 했을 법한 말을 대신 한다. “오버가 아니야. 봐봐. 끝이 안 보이잖아.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못한 게 10분은 된 것 같아. 안 그래?”“응. 안 그래. 이제 1분도 안 지났어. 조금씩 가고는 있잖아. 차 막히는 거 한두 번 겪어? 넌 차 막히면 맨날 투덜대더라.”이렇게 말하며 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겠지. 어쩌면 검지로 미간을 밀어 올릴지도 모른다. 주름 생기는 걸 걱정하면서.“저 광고판이 핑크색이면 이런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도 있었을 텐데.”“광고판이 핑크색이면 재밌어?”“허공에 떠 있는 픽셀처럼 보일 것 같지 않아? 현실 세계가 깨진 것처럼. 왜, 버퍼링 때문에 영상이 깨질 때가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느낌으로. 그래서 그냥 멍하니 보고 있으면 재밌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안 그래?”“듣고 보니 재밌을지도? 근데 핑크 말고 쨍한 파랑 어때?”“파랑? 그게 더 좋겠다. 블루스크린 느낌 말하는 거지? 근데 아마 그 쨍한 파랑은 화면 아니면 구현하기 힘들걸?”“그래도 핑크보다 파랑이 더 좋을 것 같아. 그래야 네가 말한 픽셀 같이 보일 것 같아.”“알겠어. 그럼, 파랑으로 칠하자.”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꾹 감았다 뜬다. 넌 이 차에 탄 적이 없다. 차를 탈 때마다 생각한다. 너와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면 어땠을까? 픽셀 이야기를 하니까 왠지 모르겠지만 비틀스의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앨범이 듣고 싶다. 그걸 틀면, 넌 또 비틀스냐며 지긋지긋해했겠지.“뭔가 깨진 현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아마 넌 내 말을 무시하고 내 핸드폰을 뺏어서 네가 듣고 싶은 음악으로 바꿔 틀 거야. 이렇게 상상으로만 함께 차를 탈 수 있다는 게 아쉽다. 그때 차가 있었다면 어디든 함께 갈 수 있었을 텐데. 네가 떠나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쉽게 울었다. 집 안 곳곳에 남아있는 네 흔적 때문에. 여전히 그것들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다. 열심히 피해 다니지만, 너무 많아서 피하기가 쉽지 않다. 이사를 하든가 해야지.“이사 가려고?”“응. 슬슬 집을 찾아보고 있어.”“돈은 있고?”“보증금 받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혼자 사니까 크기를 좀 줄여도 되고.”“어디로 갈 건데?”“이 동네는 안 벗어나려고. 네 흔적이 아예 없는 곳으로 가고 싶진 않거든. 골목을 걷다가 문득 네 생각을 한다거나, 하는 정도는 하고 싶어. 근데 지금처럼 매일 시달리고 싶진 않아.”“결국 흐릿해질 거야.”“아니야. 좀 지나보니 알겠어. 너랑 같이 살았던 그 몇 년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기억이 점점 늘어날 거야. 오늘처럼 널 생각하는 날이 기억에 남고, 널 생각하던 날을 떠올리는 어떤 순간이 머릿속에 새겨지고, 널 생각하던 날을 떠올렸던 어떤 순간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모습을 기억하게 되는 식으로.”“저 광고판 봐봐. 예전에 무슨 광고가 있었는지 알겠어?”“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너도 저 광고판처럼 될 거야.”“그게 무슨 말이야?”“결국 네게 난 지워질 거라고. 내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이 덧씌어질 거야.”“아니라니까.”앞 차가 움직이는 걸 따라 액셀을 잠시 밟았다 떼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1미터 정도 앞으로 간 것 같다. “혼잣말은 언제까지 할 거야?”“몰라.”“그만해. 그러다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볼 거야.”“걱정하지 마. 혼자 있을 때만 하니까.”걱정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나도 그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 아니, 생각을 그만하라는 게 아니라 혼잣말을 그만하라는 이야기야. 대체 혼잣말을 왜 하는 거야? 이상하잖아. 1인극도 아니고. 아무리 혼자 있다지만…… 이게 다 저 광고판이 비어있어서 그래. 왜 광고를 못 받는 거지? 효과가 없으니까 회사들이 광고를 안 하는 거지. 물론 광고가 있으면 지나치는 사람들이 보긴 하겠지. 근데 그렇게 잠깐 보는 걸로 무슨 홍보가 되겠어. 기껏해야 광고 문구가 기억에 남는 정도일 텐데, 그것도 문구가 좋아야 가능한 이야기야. 어떤 카피라이터가, 책을 읽지 않는 이 사회에서 이따금 책을 읽는, 가끔은 시집을 읽는 희귀한 사람인 그가, 어쩌다 운 좋게 쓴, 날 선 감각의 후크가 장착된 카피여야 가능할까 말까야. 그러니 누가 광고를 하겠냐고. 돈이 남아도는 대기업이나 하겠지. 근데 광고하는 대신 그 남아도는 돈을 직원들한테 나눠주면 좋을 텐데. 안 그래? “또 오버한다.”환청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