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과 아이스크림

글. 김종소리 사진. 조재무

도보로 갈 만한 거리에 천이 있는 건 축복이다. 천변에 달릴 수 있는 길까지 있다면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하다. 암스테르담의 운하나 교토의 가모강처럼 주변 풍경까지 아름답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말자. 이 기적 같은 천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좁다란 동네 골목이나 달리는 신세였을 것이다. 길 양옆으로 다닥다닥 틈 없이 붙은 건물이 하늘을 가리고, 이따금 하늘이 보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시야에 전깃줄이 들어오는, 상상만 해도 답답한 그런 골목 말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건물을 바짝 붙여서 짓는 걸까? 왜는 무슨 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 중 8할 이상이 돈으로부터 시작한다. 멀리 벤치가 보인다. 앉아서 천이나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내겐 그럴 물리적인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핸드폰을 본다. 30분 안에 집으로 돌아가야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쉬는 날이었으면 앉았을 텐데. 아쉽다. 우리는 쉬는 날이면 종종 뒷산으로 산책을 갔다. 땀이 조금 난다 싶을 때쯤이면 중턱 부근의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벤치나 정자 같은 건 없고 녹슨 운동기구가 몇 개 놓인 공터였다. 우리는 그곳의 벤치프레스에 앉아 바람을 쐬곤 했다. 나는 녹슨 바벨을 쳐다보며 궤변을 늘어놓았다.“운동은 만병의 근원이야. 운동하면 체온이 오르고 땀이 나잖아? 높은 온도에 적당한 습도, 세균이 번식하기 딱 좋은 환경이 되는 거지. 게다가 지쳐서 힘든 상태일 테니 평소보다 면역력이 떨어져 있겠지? 그럼 당연히 병에 걸리기 쉬울 테고. 더군다나 운동기구가 저것처럼 녹슨 쇳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네.”선배는 이마에 손등을 대며 물었다.“그럼, 뭐 하러 산에 올라와?”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낸다. 발 딛는 리듬에 맞춰 숨을 내쉰다. 나는 지금 병에 걸리기 쉬운 상태다. 높은 온도에 적당한 습도. 그럼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살려면 달려야 하는 나이다. 이제 내 삶은 궤변이 되어버렸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여덟 시간 이상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고, 어딘가 찌뿌둥한 느낌. 비 오는 날엔 허리나 무릎이 쑤신다. 특히 허리. 정말 지긋지긋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앉아도 아프고, 서도 아프고, 누워도 아프고, 걸어도 아프고, 뭘 해도 아프다. 할 수만 있다면 허리를 잘라내고 가슴과 엉덩이를 붙이고 싶을 정도다. 술도 많이 약해졌다. 약해지기만 하면 다행이었을 텐데. 문제는 냄새다. 술을 좀 많이 마셨다 싶으면 최소한 이틀 동안은 몸 어딘가에서 알코올 냄새가 진동한다. 그날도 술을 좀 마신 날이었다. 취기 탓에 쓸데없이 옆자리 사람에게 이런 아저씨스러운 한탄을 늘어놓았다. 내일도, 모레도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겠죠. 그러자 그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달리세요. 헬스 끊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하고 러닝머신만 뛰는데도 확실히 컨디션이 좋아지더라고요.”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의 말에, 초중고 통틀어 체육 시간을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는, 운동회라면 치가 떨리는 내가 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좋아하는 운동을 고르시오. 반드시 하나 이상 골라야 합니다. 나는 고민 끝에 억지로 달리기를 고른다. 괄호 치고 긴 설명을 붙인다. 누군가와 겨뤄 이기고 지고를 결정하는 100미터 달리기 따위는 싫습니다. 체육 시간, 다른 놈들이 축구할 때 슬그머니 빠져나와 혼자 운동장 가장자리를 슬렁슬렁 달리는, 그런 달리기라면 할 만합니다. 그래. 달리자. 하지만 다음날, 나는 알코올 냄새에 취해 하루 종일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떴을 땐 그다음 날 새벽. 이제 달려볼까? 어디를? 달리자고 헬스를 끊자니 돈이 아까운데. 불현듯 천변을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천이 있었지. 나는 무작정 나가 오랜 시간 천천히 달렸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이상하게 그게 기분이 좋았다. 그날 이후 1년이 넘도록 꾸준히 달리고 있다. 지금도 달리고 있고 앞으로도 달릴 생각이다. 천천히 걷고 있는 이 강아지는 곧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달리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만날 수 있는 것. 천 위로 오리들이 줄지어 떠간다. 누군가 센트럴파크의 오리는 겨울에 어디로 가냐고 물었던 것 같은데, 무슨 소설이었더라? 다행히 이곳 천의 오리는 겨울에도 있다. 오리는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귀여우니까. 비둘기는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다지 귀엽지 않다. 가끔 귀여울 때가 있긴 한데 보통은 귀엽지 않다. 오히려 조금 무서울 때가 더 많다. 가까이에 산이 있어서 그런가, 우리 동네엔 이따금 까마귀도 보인다. 까마귀는 윤기 나는 검은 털이 멋지다. 오리나 비둘기에 비해 덩치가 좀 큰 편이라 조금 무서울 때도 있긴 한데 비둘기에 대한 공포와는 다른 공포다. 비둘기 공포가 깜짝 놀라는 것이라면 까마귀 공포는 경외심이다. 까마귀가 그렇게 똑똑하다던데. 배고프다.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치킨을 먹어야겠다. 치킨을 먹다 말고 뜬금없이 선배가 물었다.“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식상하다 못해 지겨운 질문. 그렇지만 조금 생각해 볼까? 말장난에는 사전적 정의로 대응하는 것이 상책이다. 달걀은 닭알에서 유래한 단어로 닭의 알이란 뜻이다. 닭의 알이 있기 위해선 닭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닭이 달걀보다 먼저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어떨까? 닭은 어떤 새의 유전적 변화, 돌연변이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이 먼저다. 날 때부터 닭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가? 후천적으로 진화하기도 하나? 문과가 또⋯⋯. 만약 후천적 진화가 있다면 닭이 먼저일 수도 있겠다. 닭이 먼저든 달걀이 먼저든 결국 50 대 50 확률이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였다. 선배는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어날수록 두려워했다. 자신이 코로나에 감염될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며. 나는 선배와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감염되거나 감염되지 않거나 50 대 50 확률이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많든 적든 감염될 사람은 감염되고, 감염되지 않을 사람은 감염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재수 없으면 감염되는 것이고, 운이 좋으면 감염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이젠 의미 없는 말장난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이 코로나에 감염되었다. 죽은 사람도 죽지 않은 사람도 있다. 죽는 건 100 대 0이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죽음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존재의 소멸은 늘 가슴 아프다. 존재가 소멸해도 흔적은 소멸하지 않고 남아 존재를 상기시킨다. 코로나 후유증을 경험한 사람은 감염자 중 몇 퍼센트나 될까? 선배는 괜찮을까? 그렇지 않아도 비염 때문에 늘 고생이었는데. 비염이 더 심해지진 않았을까? 냄새도 잘 못 맡았는데 더 잘 못 맡게 된 건 아닐까? 그럼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안 좋은 냄새도 잘 맡지 못하게 되었을 테니까. 머리카락을 코까지 끌어당겨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선배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이래서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하는 거야. 흡연실 대신 옥상에 흡연 장소를 만들면 되지 않아? 일본 백화점처럼 옥상을 개방해 주면 얼마나 좋아? 그때처럼 하늘 보면서 아이스크림 한 입 먹고 담배 한 입 피우고 싶다. 어디 없나?” 다 좋다. 옥상도 좋고, 담배도 좋고, 다 좋은데, 문제는 선배가 말한 아이스크림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아이스캔디라는 점이다. 선배는 상큼한 아이스캔디를 좋아했다. 선배는 아이스캔디든 아이스크림이든 빙과란 빙과는 죄다 아이스크림이라고 불렀다. 뭐라 부르든 내가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되니까 딱히 매번 정정하진 않았지만 선배의 ‘아이스크림’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아니고 아이스캔디.’ 하지만 이 나라는 모든 사람이 아이스캔디든 아이스크림이든 모든 빙과를 아이스크림이라 부르는 곳이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화에서 오류가 나는 일이 빈번하겠지만 사소한 문제니 무시하고 지나쳐도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이스캔디를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르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 둘은 전혀 다른 것이잖아. 안 그래? 누군가 묻는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나는 차갑고 부드러운 크림을 상상하며 먹겠다고 한다. 누군가가 내게 아이스캔디를 건넨다. 또 이러지, 또. 나는 딱딱한 얼음을 씹는 게 싫다. 그래서 사양한다. 누군가는 어이없다는 듯이 조금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겠다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했지 아이스캔디를 먹겠다고 한 적은 없다고 답한다. 그러자 누군가는 아이스캔디가 뭐냐고 묻는다. 나는 설명하기 귀찮아 아이스캔디를 받아 억지로 먹는다. 차가운 얼음을 씹으니 이가 시리다. 이래서 아이스캔디가 싫다니까.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사소한 문제가 아니지 않나? 의식 있는 시민이라면 아이스캔디와 아이스크림 때문에 상처받을지 모를 소수를 배려해야 한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이스캔디 먹을래? 선배는 상처받았을까? 나는 상처받았나? 모르겠다. 그때 나는 후회할지 후회하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후회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이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편이었다. 헤어진 다른 연인들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선배의 얼굴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몇 년 뒤면 다른 연인들처럼 선배의 얼굴도 잊을지 모른다. 반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치킨은 순살 반 마리로. 한 마리는 혼자 먹기엔 많으니까. 캔맥주도 잊지 말고 사야 한다. 냉장고에 남은 게 없다. 사는 족족 다 마셔버리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어제 마신 생맥주는 유독 맛이 좋았다. 한 모금 쭉 들이켜며 맛있다, 생각하는데 밖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욕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야심한 시간에 바깥에서 들리는 욕이라니. 누구나 사는 건 힘들다. 사는 게 쉬운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래도 오밤중에 큰소리로 욕지거리? 욕하고 싶지만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니 함부로 욕하지 말자. 아무리 사는 게 힘들더라도 욕은 하지 말자. 속으로 하더라도 입 밖으로는 내지 말자. 생각만 하는 건 죄가 아니니까. 바람피우고 싶으면 속으로 피우면 된다. 실제로 피우는 순간 그건 문제가 되지. 선배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던 걸까?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최후의 감정은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것도 나는 사랑이라 부른다. 둘은 엄연히 다른데 왜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그럼, 그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저기 보이는 커플은 최초의 사랑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최후의 사랑을 느끼고 있을까? 최초와 최후라니 어딘가 맞지 않는 설명 같지만 달리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이 새벽에 커플?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밤새 함께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건가? 두 손 꼭 잡고. 호시절이다. 알코올 냄새를 날리기 위해 달리는 아저씨와는 다른 삶이다. 내가 할 말을 찾는 동안 선배는 침묵했다. 우리는 변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재밌게 느껴졌던 때가 있다. 하지만 어느새 시들해졌다. 영화를 봐도 음악을 들어도 책을 읽어도 그저 그랬다. 우리가 그런 게 맞을까? 나만 그랬던 건 아닐까? 언젠가부터 나는 뒷짐 지고 상황을 지켜보는 노인네 같다. 어젯밤 뜬금없이 들린 욕처럼 세상이 실감 나지 않는다.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시들해지는 감정도 점점 멀어지는 선배도 실감 나지 않았다. 전부 내 앞에서 나를 포함한 채 진행된 일이었는데. 어쩌면 나는 끝이 오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헤어지는 상황에 놓인다면 뒷짐을 풀고 실감 나게 이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실감 나는 아픔. 뭐 이런 거? 아니,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선배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왜? 그런데 왜 그런 거야? 이제 그만 생각할 때가 됐다. 갈 데까지 간 것 같으니 그만하자.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그냥 달리자. 생각을 지우자. 얼른 집에 가서 샤워하고 출근하자. 출근하면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노동의 유일한 장점. 생각 때문에 잠이 안 올 땐 눈을 감고 어둠을 응시한다. 언어가 떠오르려 하면 문장을 완성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단어에서 끝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둠을 보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게 잘 되면 잠이 온다. 잘 안되면 계속 뒤척이는 수밖에 없다. 뒤척이는 것도 이만하면 병이다. 이제 슬슬 달리기를 멈추고 잘 때가 됐다. 선배는 잘 때 정말 교과서적인 모습이었다. 시체처럼 똑바로⋯⋯ 눈을 감고 어둠⋯⋯ 그럼, 뭐 하러 산에 올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