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와 무진기행

글. 김종소리 사진. 조재무

휴대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그는 알림을 확인했다.“너 혹시 ○○역에 있어?”그녀가 보낸 메시지. 그는 휴대폰 위로 손을 내밀었다 도로 거두었다. 그리곤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곧 검은 화면이 알림창을 집어삼켰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잠금 해제한 뒤 메시지 앱을 열까 말까 망설였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 질문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그녀는 이미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주고받던 친근한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잘 잤어? 배 안 고파? 산책 갈까? 이제 잘래? ⋯⋯ 하지만 그는 수많은 말들 중 단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는 마른 목을 움켜쥐고 힘겹게 말들을 삼키며 깨달았다. 그녀에게 전할 수 있는 건 마지막 말뿐이라는 것을. 그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전할 마지막 말을 찾기 시작했다. 이따금 그는 말을 찾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것을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긴 하는데 단어 몇 개를 조합하는 것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그는 단어 대신 이야기를 찾으려 했다. 그것과 작은 부분이라도 닮아있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풀어내는 것이 그나마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았다. 이야기를 찾는 일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대개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의 부모가 그랬고, 친구들이 그랬다. 때때로 그들은 화를 내거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없다고? 왜 대답을 안 해? 다른 이야기 하자. 그는 열심히 이야기를 찾으며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상대에게서 조금이라도 지겨워하는 낌새가 느껴지면 대충 떠오른 단어를 뱉어버렸다. 무슨 말이라도 일단 말을 하기만 하면 상대방이 화를 내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것을 잘 표현했는지 어쨌는지 따위 알 게 뭔가. 애초에 그것을 잘 표현했는지 못 했는지 확인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긴 한가? 날이 갈수록 그녀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는 궁금해졌다. 둘 중 어느쪽도 마지막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끝나는 것보다는 이렇게 끝없이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침묵의 시간은 그녀가 보낸 메시지로 끝나버렸다. “너 혹시 ○○역에 있어?” 예상과 다른 그녀의 말에 그는 당황했다. ○○역? 뭐라고 답하지? 근데 웬 ○○역? 그는 휴대폰을 들고 ‘○○역’을 포털 검색창에 썼다. 관련 검색어로 ‘○○역 칼부림’, ‘○○역 범인’, ‘○○역 맛집’이 떴다. 그는 ‘○○역 칼부림’을 눌렀다. ‘○○역 지하철서 40대 남성 칼부림⋯ 5명 부상’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그래도 죽은 사람은 없나 보네.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야. 그래도 죽은 사람이 없는 건 다행이야.  그는 그녀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 먼저 함께 살자는 말을 꺼낸 건 그였다. 반년 됐나? 계속 같이 있은 지? 이렇게 계속 우리 집이랑 너희 집 왔다 갔다 하면서 살 거면 그냥 같이 살래?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을 설명하고 싶어 마땅한 말을 떠올리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와 처음 만난 건 신입생환영회라는 명목의 술자리에서였다. 한 학년 선배였던 그녀가 그에게 던진 질문. 좋아하는 소설이 뭐야? 그는 눈치를 보며 떠오르는 걸 대충 말했다. 김승옥이요. 김승옥 뭐? 〈무진기행〉이요. 〈무진기행〉이 왜 좋은데? 그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찾기 시작했다. 왜 김승옥이 떠올랐을까? 왜 하필 〈무진기행〉? 그는 김승옥을 좋아하긴 했지만 딱히 〈무진기행〉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안개 묘사가 좋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릴까? 근데 거기 안개 묘사가 나오긴 했던가? 그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충 말하면 대충 말한 걸 들킬 것 같았다. 어쩌면 대충 말했다는 사실에 그녀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사실 〈무진기행〉 별로 안 좋아해요. 김승옥을 좋아하긴 하는데⋯⋯ 잠시만요. 제목이 뭐였더라? 서울 뭐였는데⋯⋯. 〈서울, 1964년 겨울〉? 네. 왜 좋은데? 그는 좋아하는 이유를 표현할 이야기를 더듬더듬 찾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맥주를 마시며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 남자 이상하다. 혹시 재킷 안에 칼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칼을 빼 들어 나를 찌르면 어쩌지? 그럴 때면 슬그머니 다른 칸으로 이동해요. 불길한 예감에는 어떤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가만히 있다가 배에 칼이 꽂힌 채 쓰러져 흐르는 피를 손으로 받아내는 일이 생기면 어떡해요. 그럼 후회하겠죠. 아까 다른 칸으로 피할걸. 한 칸 옮긴다고 손해 볼 것도 없는데. 그 소설에는 이런 불길한 예감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그 예감은 적중하고요. 저는 그 소설에서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마음이 아프지만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따뜻해요.그가 함께 살자는 말을 꺼내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찾아 헤매다 10년도 더 전의 일, 처음 만났던 때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메시지 앱을 열고 가만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역에 있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그녀가 그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나 ○○역 아니야. 걱정 마.”그가 말했다. “응.”그녀의 대답은 건조했다. 그는 눈을 감고 기억이 담긴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전할 알맞은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둘 사이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